한국의 주소 시스템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국에서 살면서도 주소 체계가 바뀐 걸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택배 받을 때 그냥 동네 이름이랑 번지 적으면 됐던 게 어느 순간부터 "OO로 몇 번길 몇"으로 바뀌어 있었고, 처음엔 그게 뭔가 싶었다. 도로명 주소로 전환된 게 2014년이었는데, 그때 우리 어머니는 몇 달 동안 옛날 지번 주소만 고집하셨다. "이 동네 살면서 몇 십 년인데 주소를 왜 또 바꿔" 하시면서. 사실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한국의 주소 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가 공존하는 구조다. 예전부터 쓰던 지번 주소와, 지금 공식적으로 쓰는 도로명 주소. 지번 주소는 토지 필지 번호 기반이라서, 예를 들면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123-4' 이런 식이다. 근데 문제는 이 번호들이 개발 순서대로 붙여진 거라 지리적으로 연속성이 없다. 옆집이 123번지인데 그 옆은 456번지일 수도 있는 거다. 외국인들한테는 말 그대로 미로였고,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한국 사람들도 어딜 찾아가려면 근처 랜드마크 기준으로 "편의점 지나서 왼쪽 골목 두 번째 집"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이게 문화로 자리잡혔을 정도였으니까.
도로명 주소는 그 비효율을 바꾸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길에 이름을 붙이고, 그 길 번호로 위치를 특정하는 방식이다. '마포구 양화로 100'이면 양화로라는 도로에서 100번쯤 되는 위치라는 게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홀수는 도로 왼쪽, 짝수는 오른쪽이라는 규칙도 있어서 번호만 봐도 어느 편인지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 주소 방식이랑 비슷한 개념인데, 그쪽 사람들한테는 한국 주소가 갑자기 읽기 편해진 셈이다. 실제로 국내 거주 외국인들 사이에서 도로명 주소 도입 이후 길 찾기가 훨씬 수월해졌다는 얘기가 꽤 나왔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두 시스템이 아직도 같이 돌아가고 있다. 등기부등본이나 토지 관련 서류에는 여전히 지번 주소가 쓰이고, 일상적인 배달이나 우편에는 도로명 주소를 쓴다. 부동산 계약서 쓸 때 두 주소가 다 나오면 처음 보는 사람은 뭐가 뭔지 헷갈리기도 한다. 게다가 지방 소도시나 농촌 지역은 아직 도로명 자체가 없는 곳도 있어서, 거기선 지번 주소가 사실상 유일한 주소다. 완전히 전환됐다고 보기엔 아직 과도기 느낌이 있는 게 사실이다.
재미있는 건 이 주소 체계가 한국 사람들의 공간 인식 방식이랑 연결된다는 점이다. 지번 주소 시절엔 사람들이 동네 이름이나 구획 단위로 장소를 인식했다. "홍대 앞", "신촌 쪽", "강남역 근처"처럼 넓은 범위로 위치를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반면 도로명 주소가 퍼지면서 길 이름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다. 아직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10대나 20대 초반은 도로명 주소에 더 익숙한 경우도 있다. 내 조카한테 "몇 번지야?" 물었더니 "그게 뭐예요, 도로명으로 알려줘요"라고 했을 때 살짝 충격이었다.
결국 주소라는 게 단순히 위치를 표시하는 숫자나 문자 조합이 아니라, 그 사회가 공간을 어떻게 나누고 기억하는지를 반영하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 지번에서 도로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개발 위주의 필지 중심 사고에서 이동과 접근성을 중심에 두는 사고로 옮겨가는 흐름이기도 하다. 물론 어머니 세대한테는 여전히 동네 이름이 더 익숙하고, 그게 틀린 게 아니다. 그냥 다른 언어를 쓰는 것처럼, 두 세대가 같은 공간을 다르게 읽고 있는 거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여전히 길을 찾고 있다.